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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 별과같이 빛나는 『황사영백서』이야기와 배론성지

글쓴이 : 포토바이블 날짜 : 2013-03-04 (월) 10:16 조회 : 2526


베론성지

85. 별과같이 빛나는 『황사영백서』이야기와 배론성지

충북 제천의 <배론성지>는 초기 한국천주교 역사와 관련한 대표적인 유적지이다(2001년 충청북도기념물 제11호로 지정). ‘배론(舟論)’이란 지명은 이곳 지형이 배 밑바닥처럼 깊고 길게 뻗어 있다고 하여 붙여졌다. 배론성지는 황사영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

황사영(1775-1801)은 1790년 16세에 진사시에 급제하여 정조의 특별한 격려를 받고 등용의 약조를 받았다. 그리고 정약용의 맏형 정약현의 사위가 되어 앞날이 창창한 인재였다. 그러나 그는 탄탄대로 대신 ‘알렉시오’라는 세례명으로 1791년에 천주교에 영세 입교함으로 좁고 험난한 길을 택한다. 정조는 황사영이 과거시험에서 백지를 내는 것을 알고 대신들을 통해 다시 응시할 것을 권유하였으나 후에 천주교에 입교한 것을 듣고는 몹시 슬퍼하였다고 한다. 그 후 황사영은 1795년 주문모 신부의 측근으로 활동하면서 주 신부가 조직한 명도회의 핵심회원이 되었으며 벼슬길을 버리고 전교사업에 힘을 기울인다. 그리고 1796년에는 이승훈, 권일신 등 당시 교회의 기둥 같은 인물들과 함께 북경의 주교에게 서양 선교사를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다. 그리고 1798년 서울로 이주하여 신자 청소년들에게 글을 가르치고 한문으로 된 교회서적을 번역하는 등, 적극적으로 활약한다. 이와 같이 당시 교회의 극비상황에 관여하는 등, 신유박해가 일어나기 직전에 청년 황사영은 교회의 가장 중요한 지도자로 부상해 있었다.

그러다 1801년(순조1)에 신유박해가 일어나 많은 천주교신자들이 체포되어 처형을 당했다. 사태가 급박해지자 창원황씨 문중에서는 회의를 열고 천주교신자인 황사영에게 벼슬길에 나가도록 강권하였다. 그러나 그는 깊이 숙고한 끝에 결단하고 신앙을 지키기 위해 충북 제천의 배론으로 숨어든다. 배론은 박해를 피해 온 수많은 초기천주교회 신자들이 공동체를 이루고 있었다.

황사영은 배론의 토굴 속에 8개월 간 은거하면서 민족복음화와 민족구원을 위해서 주님께 간절한 기도를 드린다. 그러던 중 그해 4월 19일 주문모 신부의 순교 소식을 듣게 된다. 조선천주교회가 주문모 신부에 의해 북경을 통해 세계교회와 연결되어 왔는데 이제 완전히 동떨어진 외진 변방이 될 처지에 놓일 것을 우려한 황사영은 조선교회의 사정을 북경에 알리는 일을 맡기로 결심한다.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이 일에 천주교 신도인 황심, 옥천희 등도 합세하였다.

황사영은 토굴 속에서 장문의 서한을 써서 북경교구의 구베아 주교에게 보낼 것을 계획한다. 그는 자신이 겪은 사실과 전해들은 사건들을 요약하면서 교우 26명의 순교사실과 활동내용, 주문모 신부의 활동과 순교, 그리고 박해로 인한 교회의 피폐상과 박해를 그치게 할 대안 등을 가로 62cm, 세로 38cm의 흰 명주 천위에 붓으로 122행, 12,348자를 깨알같이 써 내려갔다. 이것이 ‘명주에담은신심’, 곧 “백서(帛書)”이다. 서론에는 1785년 이후 교회의 사정과 박해의 발생에 관해 설명하고, 본론에서는 신유박해의 전개과정을 상세히 밝혔다. 그리고 결론에서는 조선천주교회가 신앙의 자유를 획득할 수 있는 방안으로 ①국제적인 재정원조 요청 ②북경 천주교회와 연락 ③청나라의 종주권 발동책 ④조선감호책 등을 제시하였다.

마침내 황심은 이 해 8월 하순 황사영이 작성한 백서를 들고 옥천희를 통해 북경 구베아 주교에게 전달하려고 시도하였다. 그런데 그 해 10월, 이 서한을 가슴에 숨기고 가던 옥천희는 국경에서 체포되고 백서도 발각되어 압수되고 말았다. 황심과 토굴 속에 있던 황사영까지 체포되었다. 조정에서는 천주교 탄압을 막아주고, 청국은 조선의 종주국이니 이를 외면하지 말라는 ‘백서’의 내용이 매국적 의도라고 판단하였다. 이 일로 황사영은 1801년 11월 5일(음력) 대역죄로 서소문 밖에서 능지처참을 당하고 관련자들이 순교하여 백서 사건은 종료되었지만, 천주교에 대한 탄압의 강도를 높여 더 많은 순교자가 생겨났다. 한편 1894년 갑오개혁 후 옛 문서 파기 때 문서를 정리하던 과정에서 『황사영 백서(帛書)』원문이 발견되어 조선교구장이던 뮈텔 주교가 이를 입수하였고 1925년 한국순교복자 79위 시복식 때 로마 교황 비오11세에게 예물로 보내져 현재 교황청 선교민속박물관에 역사적인 자료로 보관되어 있다.

배론성지는 가장 일찍 교우촌이 형성된 곳, 『황사영 백서』가 탄생한 곳이며 또한, 최초신학교인 ‘성 요셉 신학교’가 자리 잡았던 곳, 두 번째 조선신부인 최양업(1821∼1861. 토마스)의 시신이 안장되어 있는 곳, 1866년의 병인박해 때 성인들의 순교사가 시작된 요람지이기도 하다. 1784년에 이 땅에 들어온 가톨릭은 전래된 지 100여 년간 황사영의 백서 사건처럼 핍박하는 정부를 상대로 무력전쟁을 하였다. 그리하여 천주교는 엄청난 박해를 받았으며, 그로 인한 순교자만도 10,000명이 넘는 것으로 추정된다. 모숨을 바쳐 하느님을 섬겼던 분들이 비단 황사영만이 아니었다.

한편 개신교는 천주교 박해가 한창이던 1866년 9월5일, 선교사 토마스(R.J. Thomas 1840~1866)가 27세의 젊은 나이에 조선 땅에 최초로 복음을 전하러 왔다가 대동강 쑥섬 모래사장에서 첫 순교자가 되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함같이 예수 이름으로 죽어간 가톨릭과 개신교 순교자들의 피의 대가는 오늘에 이르러 놀라운 결실을 거두었음에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린다.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단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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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글: 진흥홀리투어(주), 한국기독교성지순례선교회 회장 박경진 장로 (02-2230-5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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